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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6월 항쟁으로 대통령 직선제 개헌이 이뤄졌다. 김영삼 김대중 양 김씨는 분열했다. 1987년 12월16일 대선에서 노태우 민주정의당(민정당) 후보가 당선됐다.
정권교체에는 실패했지만, 합법적이고 대중적인 공간이 열렸다. 민주화운동청년연합(민청련),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민통련),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 등 재야 민주화 운동 단체에서 활동하던 사람들은 새로운 진로를 모색해야 했다.
민청련, 민통련, 국민운동본부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았던 이해찬은 창간을 앞두고 있던 한겨레신문에 갈 생각을 했다. 재야 운동을 할 때 늘 정책이나 기획 분야를 맡아 정세 분석이나 글 쓰는 일에 익숙했기 때문이다. 본래 책이나 잡지, 출판에 관심이 많았다. 그는 한겨레신문 창간 발기인으로 참여하기도 했다.
그런데 1988년 4·26 13대 총선을 앞두고 김대중 총재의 평화민주당(평민당)이 재야인사들에게 영입을 제의했다. 김대중 총재는 대선에서 3등을 하면서 분열의 책임을 뒤집어쓰고 난감한 처지에 빠져 있었다.
‘김대중 후보 비판적 지지’(비지) 그룹이었던 문동환·박영숙·이상수·임채정·장영달·이해찬 등 97명이 평민당에 입당하며 평화민주통일연구회(평민연)를 결성했다. 김학민·우원식·윤호중·김현미·김한정·김현·백원우 등도 평민연이었다. 선거 제도가 갑자기 소선거구제로 바뀌면서 평민연 회원들이 대거 총선에 출마했다. 평민당은 호남과 서울에서 선전하며 70석 제1야당으로 올라섰다.
이해찬은 서울 관악을에서 민정당 김종인, 통일민주당 김수한 후보를 꺾고 당선됐다. 그의 나이 36살이었다. 관악<a href="https://www.shillacz.com/bucheon/">부천출장샵</a>을에서 그는 모두 다섯 차례 당선됐고, 지역구를 세종으로 옮겨 두 차례 더 당선됐다.
이해찬은 재야 민<a href="https://www.cpcz88.com/63">경주출장샵</a>주화 운동을 할 때나 정치를 할 때나 명분보다 실리를 중시했다. 1980년대 재야 민주화 운동 세력은 급진적 노선과 대중적 노선이 충돌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해찬은 늘 대중적 노선을 선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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